현 해 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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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를 사이에 두고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갈라놓은 바다, 현해탄(玄海灘). 물이 깊고 항시 검은 빛을 띠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해탄은 동아시아 대륙에서 뻗어 나온 한반도와 대륙에서 떨어져 나간 열도를 이어 주는 바다였다. 태고적엔 하나로 붙어있던 육지가 지각 변동으로 찢어지고 튕겨져 나갔다. 살점이 뭉텅 떨어져나간 그 곳에 상처가 생겨 틈새가 벌어졌고, 찢겨져 나간 그 아픔의 자리에 고통의 눈물이 흘러 스며들었다.
현해탄은 눈물로 이루어진 바다였다.
대륙에 붙어 남은 반도와 튕겨져 나가 갈래갈래 흩어진 열도는, 그 뜯겨져 생긴 상처를 안고 오매불망 서로를 그리워했다. 상처를 안은 현해탄은 마치 피멍이 변해버린 자국처럼 유난히 시커먼 빛을 띠었다. 대륙에 붙은 반도와 튕겨 끊어져 나간 열도를 이어주는 바닷길이 되었지만, 찢겨지고 뜯겨져 나가 생긴 반도의 생채기와 열도의 균열은 그 흉터가 컷고, 그 만큼 고인 눈물도 깊었다.
커다란 별리의 상처와 슬픔을 안고있는 반도와 열도는 서로를 그리워하면서도, 어리석고 변덕 심한 인간들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주인이 될 때마다, 창과 방패가 되어 부딪쳤고 불꽃을 튀겨냈다. 그때마다 찢겨지고 파헤쳐진 상처의 골은 점점 깊어져, 곪고 썩어 시커멓게 변하여 갔다.
역사의 비극이 반복될 때마다 반도와 열도사이에 끼인 현해탄은 신음했고, 민중과 함께 고통스러워 했다. 민중들이 고통과 통증으로 흘린 눈물과 한을 현해탄은 모두 고스란히 받아 안았다.
지각변동으로 찢어져 나간 아픔과, 역사의 비극이 낳은 통한의 눈물이 스며든 현해탄은 그 깊은 심연에 민중이 흘린 피와 한을 켭켭이 안고있었으나, 아무도 감히 그 아픔의 깊이를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츠아악, 처억,츠아악, 처억”
제 1번대를 실은 병선은 거침없이 바다를 가르며 나아갔다. 앞쪽의 이물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현해탄을 두쪽으로 갈라 놓았다. 이를 저지라도 하듯이 파도는 멀리서부터 출렁출렁 다가와, 선체에 부딪쳤다. 날카로운 이물에 부 딪친 파도는 곧 허연 배를 드러내며 튀어 올랐다가는 사라져갔다. 그럼에도 파도는 끊임없이 너울너울 춤을 추며 다가왔다.마치 두려움을 모르며 불의에 저항하는 인간들처럼,겁없이 불을 향해 뛰어드는 부나비처럼 예리한 칼끝이 되어 버린 뱃머리로 달려들었다간, ‘츄악’하는 신음을 내며 하얗게 튀어올랐다.
시커멓게 넓게 퍼진 바다는 파도를 자꾸 만들어냈고, 그 파도는 조용히 그리고 끊임없이 다가왔다가는, 형체도 남기지 못한 채, 산산이 흩어져 사라져버렸다.
도리에몽은 철포를 어깨에 걸친 채 갑판 위에 쌓여진 나무 궤짝에 걸터앉아 있었다. 병참을 넣어 놓은 상자였다. 턱에는 수염이 시커멓게 덮여 있어, 턱선이 뚜렷하지 않았지만, 눈매가 날카로웠다. 미간 아래 솟아오른 콧날은 그리 높지 않았다. 하지만 콧등이 아래로 쭉 뻗어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모습이 이지적임을 느끼게 하였다.
그는 아무런 표정없이 철포의 방아쇠를 만지작 거리며, ‘처억 처억’ 소리의 음영만을 남긴 채, 사라져가는 파도의 잔해를 응시하고 있었다. 뱃전에 부딪 친 파도들이 하얀 피를 뿌리고 형체도 없이 허무하게 스러져가는 것으로 비췄다.
‘모두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간단 말인가? 우리는 또 어디로 가는가? '
'이번 싸움은 왜 해야만 하며, 또 어떻게 전개된단 말인가? '
'과연 죽지 않고 살아남아 무사히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
'아니면 저 포말들처럼 허무하게 사라져 버릴 것인가,,,?’
불확실한 삶에 대한 두려움과 싸움에 대한 공포,자신의 삶과 운명을 지배 하는 모든 것에서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의 미약함, 그리고 절망감에 따른 자포자기.
‘살아남아야 한다.’
심저에서 꿈틀거리는 삶에 대한 본능. 조선 출정을 위해 현해탄을 건너는 그는 부숴져 가는 포말들을 보자 만감이 교차했다. 희망의 한줄기 가느다란 빛이라도 찾고 싶었지만 그 조차 쉽게 보이질 않았다. 흡사 끝이 보이지않는 커다란 낭떠러지에 세워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운이 좋으면 살아 남고, 운이 없으면 사라져가야 하는 운명.’
‘누구를 위한 싸움이더냐! '
'내가 죽어 싸움에 이긴다고 내게 무슨 의미가 있다더냐?.'
'나 없는 이 세상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다더냐? '
'말이 좋아 만물의 영장이지. 미물과 다를 게 무엇이더냐?’
도리에몽은 암울한 기분에 휩싸여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으음.’
자신도 모르게 탄식이 새어나왔다.
‘어떻하든 살아남아야한다. 싸움터에서 죽는 거야말로 개죽음이다.'
갑판위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만감과 상념에 빠져있던 그에게 누군가 마치 정신 차리라는 듯, 커다란 고함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육지다, 육지가 보인다!”
시야가 좋아 척후로 발탁된 병사가 흥분되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타다다다닥”
뒤이어 부산하게 움직이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상념에 젖어 있던 도리에몽은 고함소리에 정신이 번쩍들었다. 발 뒤꿈치를 들어올린 채, 선실을 향해 잰발로 달려가는 병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영주 직속으로 연락을 담당하고 있던 전령이었다. 자신보다 젊었다. 군율이 몸에 배었는지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절도가 있었다.
도리에몽은 대장선에 타고 있었다. 병사와 격군을 합쳐 약 이백명의 인원이 함께 승선한 대형 아타케병선이었다. 대장선에는 화려한 누각이 쌓아 올려져 있었다. 병사들은 그 곳에 함부로 범접할 수 없었다. 그 곳에 영주가 있었다. 전령은 누각의 층계를 뛰어 올랐다. 꼭대기에 있는 지휘실앞에 이르러서는 한쪽 무릎을 꿇더니, 곧바로 상황을 보고했다.
“앞쪽에 육지가 나타났습니다. 틀림없이 부산포입니다.”
절도있는 소리였다. 소리가 하도 커, 배안 전체에 울려 퍼질 정도였다. 누각 안에서 작전을 세우며 전략을 짜고 있던 유키나가와 부장들이 밖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갑옷위에 군의를 두르고 있었다. 모두 투구를 한쪽 손으로 들어 옆구리에 받치고 있었다.
갑옷과 투구는 화려했다. 적의 창검을 막기위해 딱딱한 가죽과 청동으로 된 갑옷 위에 화려한 장식을 붙여놓았는데, 위용을 나타내 싸움터에서 적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위용을 내뿜으며 화려하게 장신된 갑옷을 몸에 걸치고 있는 왜장들의 모습은 마치 승천하는 용이 비늘을 몸에 두른 것 같은 모습이었다. 화려하고 육중한 갑옷앞에서 사람들은 절로 주눅이 들었다.
지휘실 앞에 나타난 주장 유키나가는 촛점을 맞추려는지, 눈을 작게 뜨고 난간 너머를 멀리 살폈다. 병사들은 영주인 유키나가가 나타나자 갑판위에서 일제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군기가 엄격했다.
창과 총포를 어깨에 걸친 채, 쭈그리고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던 병사들이 갑작스레 긴박하게 돌아가는 배안의 움직임을 보고는 긴장된 모습을 취했다.
도리에몽도 몸을 일으켜 세우면서 반사적으로 조총을 거머쥔 손에 꾸욱 힘을 주었다. 배안에 있던 모든 병사들이 유키나가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저 건너 보이는 것이 부산포인가?”
“예 틀림없습니다. 츠시마대에서도 신호가 왔습니다.”
유키나가는 전령의 대답을 들으며 고개를 돌려 비스듬히 옆에서 항해하고 있는 배를 바라보았다. 대마도주의 배였다. 기수가 쉬지 않고 깃발을 흔들었다. 조선의 부산포에 닿았다는 신호였다.
‘이렇게 조선땅에 오고 말았구나!’
“그런데 생각보다 조용하지 않는가?”
“저들은 우리가 온 것을 모를겁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아무튼 매복이 있을지 모르니 도착하는 즉시 척후를 내보내도록!”
“하아! 분부대로 시행하겠습니다.”
“자아, 돛을 내려라. 노를 저어 서서히 다가가도록 하라!”
유키나가의 명령이 떨어지자, 돛이 내려지고, 격군들이 노를 젓기 시작했다. 노가 일제히 들어올려졌다가 바다로 떨어졌다. 노는 조용한 바다를 사정없이 내려쳤고, 화들짝 놀란 바다는 “촤악”하고 하얀 비명을 튕겨냈다. 배는 파도에 밀려 흔들거리며 시커멓게 보이는 육지를 향해 곧장 나아갔다.
부산포 절영도 앞바다가 왜선으로 시커멓게 뒤덮혀갔다. 유키나가가 승선한 대장선을 필두로 각 지역의 영주들이 타고 있는 병선이 속도를 맞추며 나란히 부산포를 향했다. 중앙에는 유키나가가 탄 대장선을 중심으로 그 휘하 병선이 따르고 있었고, 좌익에는 대마도군이, 우익쪽으로 마츠우라와 오도열도의 영주가 탄 배가 부채꼴 대형을 이루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선단의 목적지는 부산포였다.
“모두 무장을 하고,전투태세를 갖추도록 하라."
"만일에 있을지 모를 적의 공격에 철저히 대비하도록 하라.”
누각위에서 상황을 살피던 유키나가는 육지쪽에서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다시 지휘소인 누각안으로 들어가며, 전군에게 전투 태세를 갖추도록 했다.
유키나가와 부장들이 지휘실로 들어가고 나자, 병사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저게 조선땅이라네!”
“그러게.”
“그럼, 이제 곧 한바탕 싸움이 시작되는건가?”
“그렇겠지. 근데 조선군은 어떤가?”
“낸들 아나! 그런데 츠시마에서 들은 소문인데, 조선군이 덩치는 큰데 무기는 별로라던데..”
막상 육지가 다가오자, 병사들은 다가올 전투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리려고 아는 지식, 모르는 지식 죄다 동원해 밑도 끝도 없이 한마디씩 내뱉었다.
왜군의 하급 병사의 대부분은 차출된 농민병이었다. 평소에는 농사를 짓는 농민이었으나, 전시에 동원돼 병사 역할을 하는 반농반병들이었다.
조선출병을 결정한 히데요시는 모든 영주들에게 군사 동원 명령을 내렸다. 쌀 일만석에 군사 250 여명이 배분되었다. 영지 십만석 이상의 영주들에게는 병사뿐만 아니라 식량 등의 병참과 군역을 제공하도록 했다. 또한 이번 전투는 바다를 건너는 해외정벌이기에 수군의 역할이 중요함을 감안해, 어촌 100호 마다 선원으로 쓸 어부 10명씩을 차출하도록 명령서를 내렸다.
히데요시의 이 같은 명령에 따라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차출되었다. 영주들은 각자 영지내에서 병자를 제외하고,사내라면 나이를 불문하고 모두 동원할 수 밖에 없었다. 나이를 먹은 병사들은 전투경험이 풍부한 자들이 많았으나, 젊은 병사들은 대부분 전투경험이 전혀없는 신출내기들이었다.
“상륙하면 곧 싸움이 벌어질까요?”
같은 마을에서 차출되어 온 고로가 도리에몽의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건넸다.
“글쎄, 상대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달렸겠지.”
도리에몽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윗쪽을 다시 한번 살폈다. 영주가 선실로 들 어간 것을 확인한 후, 시야를 이물 쪽으로 돌렸다. 도리에몽의 눈에는 육지가 거므스레한 형상을 하고, 뱃전앞 멀리 바다에 첨버덩 머리를 쳐박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왜군 제1번대의 형세에 기가 한풀 꺽였는지,바다는 잔잔하게 출렁거렸다.
“고로, 모두를 불러모아라.”
도리에몽은 같은 마을에서 차출되어온 일행 다섯을 불러모으도록 했다. 야이치, 고로, 히코베, 마타에몽, 다쿠로가 도리에몽의 곁으로 몰려왔다.
“상륙하면 바로 싸움이 시작될지 모른다. 조심해야한다."
"그래, 첫싸움이 가장 위험하다.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조심하라. 목숨을 귀히 여겨라.”
싸움 경험이 있는 도리에몽과 야이치가 싸움을 처음 해보는 다른 젊은이들에게 주의를 당부했다.
“싸움에서 공을 세우면 논공을 많이 받는다던데요?”
그들의 의 말이 끝나자, 고로와 같은 연령대인 히코베가 반문을 했다.
“공이고 뭐고 죽으면 아무 소용없다. 어떻게든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야 한다!”
야이치가 고로의 군모를 바로 잡아 주며 도리에몽을 바라보았다.
“이 애들이 걱정이네, 싸움 경험이 없으니...”
“고로와 히코베는 싸움 경험이 없으니까, 전투가 시작돼, 각개로 움직이게 되면 되도록 내 옆으로 붙어라. 야이치 자네는 싸움 경험이 풍부하니까, 마타에몽과 다쿠로를 봐주게."
"알았어."
"잘들어라. 절대 경거망동하지 말고, 조심해야 한다. 먼저 뛰어서는 안된다.
싸움터에서 죽으면 개죽음이다. 더구나 여긴 객지다. 죽으면 여기에 버려진다.
모두 살아서 고향에 돌아간다. 명심해라! ”
“알겠습니다.”
도리에몽은 말에 힘을 주어 강조했다. 싸움을 전쟁놀이로 생각하며 조금은 들뜬 모습을 하고 있던 고로와 히코베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곁에 있던 야이치는 더 이상 첨언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여 동감임을 나타냈다.
도리에몽의 나이 마흔이었다. 같은 마을에서 차출된 일행 중 가장 연장자였다. 히데요시가 규슈를 정벌할 때 삼십대 중반의 나이로 차출돼 몇 번의 전투에 참전했었다. 죽을 고비를 맞이한 적도 있었다. 자신은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덩치는 크지 않았지만, 몸이 빨랐으며 완력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사무라이(무사)로 출세하고자 기회를 노렸으나 도리에몽은 몇번의 싸움에 참가하고선,서로 죽고 죽이는 것이 싫어 사무라이 출세의 꿈을 버렸다.
고로의 생부는 도리에몽과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마을 친구였다. 규슈 정벌때 출전했다가 적의 총탄을 맞고 전사했다. 그러나 전사에 대한 보상은 쥐 꼬리만했다. 잡곡 몇말이 전부였다. 그게 다였다. 그밖에 아무런 도움도 없었다. 말단 병사의 죽음이야말로 개죽음과 다를 바 없었다. 도리에몽은 친구의 자식인 고로를 친자식처럼 돌보았다. 생활이 어려운 고로의 가족을 돕기위해 틈틈 히 농사일을 거들어 주었고 조금이라도 먹을 것이 생기면 나눠 먹었다.
도리에몽은 땀을 흘린 만큼 거두어들일 수 있는 농사일이 좋았다. 소작이라 생활이 여의치는 않았지만 틈틈히 텃밭도 만들고 열심히 밭을 갈았다. 자신의 밭에서 거두는 작물이 쏠쏠해 재미있었다. 성실했으며, 아량이 넓었다. 인정도 많았으며, 의리를 굳게 여길 줄 아는 인물이었다.
“도리에몽 아저씨! 바쁘시지요?”
“얘들이 아저씨를 뵙고 싶다고해, 아저씨일도 도와드릴 겸 제가 데리고 왔 어요.”
마을의 젊은이들은 평시에도 도리에몽을 잘 따랐다.
“오, 고로, 친구들과 같이 왔나 보구나?”
“농사일이 많아서 바쁠텐데, 나다닐 틈이 있느냐?”
“예 맡은 일을 후딱 끝내고 왔어요.”
“녀석들. 한창 때라 배가 고플텐데, 고구마 쪄 놓은 게 있으니, 우선 요기 좀 하거라.”
“아녜요. 먼저 일을 하고나서 먹을게요. 아저씨는 텃밭이 많으니까 잔일이 많잖아요. 저희들이 후딱 끝낼게요. 논에 난 피사리를 뽑을까요?”
“요기를 먼저하라는데도 그러는구나.”
“대신 끝나면 철포 좀 보여주세요. 그리고 싸움터 얘기를 들려주세요.”
“허허, 녀석들 알았다. 그럼 저쪽 위에 있는 밭에서 돌을 좀 골라내거라.”
도리에몽은 처음에는 창을 든 보병으로 싸움터에 끌려다녔다. 창을 들고 항상 앞줄에 서서 적을 맞이했다. 그래서 항상 위험했다. 육박전이 대부분인 창 부대보다는 원거리에서 적을 쏘는 철포부대가 안전했다. 또 그는 창을 들고 사람을 찌를 때의 느낌이 싫었다. 그래서 언제가부터 철포부대로 옮겨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싸움터에서 상대가 쓰던 철포를 습득해 고향 마을로 돌아왔다. 철포를 들고 틈이 나면 철포를 익혔다. 겨울이면 사냥을 나가 들짐승들을 잡아 왔다. 눈의 초점이 좋아서인지 총이 잘 맞았다. 마을 젊은이들 사이에서 그의 기민하고 정확한 총 솜씨는 마치 전설처럼 회자되었다. 젊은이들은 그의 총 솜씨를 존경했고, 한편으로는 부러워했다.
고로 부친이 전사하고 가장을 잃은 그의 가족들의 곤경을 곁에서 보아 왔던 그였다. 장가를 늦게 들어 아직 자식은 없었지만, 처와 노모가 있었다.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절대 싸움터에서 죽어선 안된다.’
싸움터에 나갈 때마다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곤 했다. 철포쏘는 법을 익히고, 사냥을 하면서 솜씨를 키워왔던 것도 따지고 보면 가족들에 대한 책임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철포를 들고 참전했고, 사격술을 인정받아 영주 직속 조총대에 배속 되었던 것이다.
“각 대, 제 위치로”
“빨리 빨리 움직여라!”
각대를 끌고있는 부대장들의 언성이 높아지자, 병사들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선상에서 전투태세를 취했다. 지휘관들은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고함을 쳤고, 꾸물대는 병사들에게 다가가서는 들고 있던 지휘봉으로 어깨를 내려치며 열을 정비했다.
“제 1열 철포부대, 제2열 장창부대.”
병사들이 전열을 갖추자 점호가 시작되었다.
전투대형이 이루어지자, 대장선에서 조개 나팔이 길게 울렸고 깃발수들이 재차 깃발을 흔들어 명령을 전달했다. 상륙 준비를 하라는 명령이었다.
시커멓게만 보이던 조선땅은 점점 커다랗고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병사들은 대오를 유지하며 점점 다가오는 육지를 침묵으로 바라보았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들떠있던 모습은 사라지고 표정은 조금씩 굳어갔다.
현해탄위에 떠있는 대마도와 오도열도 같은 섬은 땅이 척박해, 그곳 사람들은 주로 어업을 생업으로 하는 이가 많았다. 이들은 평소에는 어업을 생업으로 해 삶을 영위하였으나, 흉년이 들거나, 어업이 신통치않아 기근을 겪게 되면, 왜구로 변해 인근 지역인 조선이나 명을 침략해 약탈을 일삼았다. 그래서 이들 섬에서 차출된 자 중에는 오래전부터 약탈과 방화, 하물며 인신 납치를 일삼았던 자들도 많았다.
이들은 왜구짓을 통해 조선해안을 잘 알았고 조선의 지리와 풍습에도 밝았으며, 조선말에도 능통했다. 왜구 활동을 경험한 이들은 싸움 경험도 풍부했고 잔인했다. 이들 중 몇은 인정사정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자들도 있었다.
“해안에서 분탕질을 하는 어민들을 엄격하게 단속하라.”
히데요시가 일본 전국을 통일하고 조선과 외교 교섭을 하면서 조선의 요청을 받아 해적질의 단속을 철저히 하도록 했다. 해안의 감시가 심해지자, 이들은 이전처럼 왜구짓을 맘대로 할 수가 없었다. 왜구짓의 익숙했던 자들은 약탈 을 할 수 없게 되자 수입이 줄어들어 불만이 상당히 쌓였었다. 그렇지만 히데요시의 명이 워낙 엄격해, 어찌할 수가 없던 터였다. 만일 왜구짓을 하다가 발각이 되면 당사자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을 전체가 깡그리 초토화될 수 있었다.
전정긍긍하고 있는 그들에게 최고 권력자인 히데요시가 조선 정벌을 결정하 고, 각 지역에서 군사를 모으자, 이들에게는 마치 ‘불감청이지만 고소원(감히 청하지는 못하지만 원하던 바)’의 심정이었다. 이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서로 앞장 서서 지원을 했다.
“이번에 조선에 들어가면 한 밑천 크게 잡아야지!”
“나는 이번에는 주로 각시들을 노릴거야!”
“각시? 마누라가 있는 친구가 웬 각시 타령이야?”
“잘 모르는군. 나가사키에서 조선 각시들이 비싸게 팔린다고!”
“각시들을 어떻게 끌고 다닐라고? 도자기를 챙겨야지.”
“그게 쉽지, 사기 그릇은 집집마다 수북하니까.”
“근데 별로 돈이 안되잖아”
“무슨 소릴, 조선 자기는 사카이로 가져가면 금값이야, 금값.”
“그래, 그럼 나도 자기를 챙길까.”
약탈과 납치에 익숙한 이들은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싸움터에서는 암묵적으로 약탈과 납치가 허락되었다. 왜구로서 경험이 풍부한 이들은 약탈과 납치에 아무런 장애가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모두 한 몫 챙길 생각 뿐이었다. 이들의 눈은 마치 먹이를 노리는 짐승처럼 살기가 뻗치고 있었다.
“그래도 살아남는게 중요하지! 그깟 재물이 얼마나 한다고, 목숨을 바꿀수야 없지!”
“싸움터에서야 죽는 것이 ‘병가지상사’ 아니겠어. 죽기 아니면 살기지!”
“우하하, 죽긴 왜죽어? 조선군들을 잘 몰라서 하는 소리지."
"맞아, 조선군 중에는 싸움을 제대로 하는 자가 별로 없어! 아마 우리 모습을 보면 싸움도 하기 전에 도망치기 바쁠 걸!”
“동감이야. 약탈 때 못 봤어. 칼을 들고 쫒아가면 대항은 커녕 무기는 다 버리고 무릎을 꿇고 목숨만 살려달라고 두손을 싹싹 빌잖아. 칼을 휘두를 것도 없다고. 큰소리를 지르며 칼만 뽑으면 다 출행랑을 치니까. 하하하.”
이들은 나가사키 서쪽 오도열도에서 차출된 병사들이었다. 오도열도의 영주인 고토 스미하루는 히데요시의 명령을 받고 할당인원을 채우기가 힘들자, 왜구짓만을 전문으로 하는 집단도 징발해 함께 출정했던 것이다. 이들은 이미 조선해안을 침략해 이미 몇차례 조선군과 접전을 벌인 경험이 있었기에 조선군 알기를 우습게 알았다.
아무튼 오랫동안 왜구짓을 못해 그렇지 않아도 몸이 근질근질하고 물자도 넉넉치 못했는데, 그들에게 출병에 참가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으니, 그들로서는 나무에서 떨어진 곶감이 저절로 입속에 들어온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관심은 오직 하나였다.
‘한 몫 단단히 챙겨야한다.’